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고트 왕국 (문단 편집) == 외교 == 이탈리아의 [[동고트 왕국]]과의 관계는 매우 돈독해서 동고트의 [[테오도리크 대왕]](서고트의 테오도릭 1세나 2세와는 다른 인물이다.)은 서고트의 왕 알라릭 2세와 결혼 동맹을 맺었고 알라릭 2세가 프랑크 왕국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한동안 서고트 왕국의 섭정으로 서고트 왕국까지 통치하면서 프랑크 왕국의 침략을 막아내기도 했다. 서고트는 일단 명목상 서로마 황제의 수하로서 [[카탈라우눔 전투]] 같은 전투에 종군하고 서로 중요한 무역 파트너였지만 서로마 제국이 군주들의 실정과 반달족, [[프랑크족]], [[앵글로색슨|색슨족]] 등 다른 게르만족들의 압력으로 워낙 빌빌거렸다 보니 가끔 무리하게 하사금을 요구하거나 기분 나쁘면 한 대씩 치고 윽박지르는 그야말로 형식적인 상하 관계였다. 반달과의 관계는 초기에는 험악했지만 이후 공적이 된 동로마를 견제하기 위해 친밀해졌다.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수에비 왕국과 바스크족과는 끊임없이 전쟁을 치뤘고 이 중 수에비 왕국은 [[리우비길드]] 왕에게 결국 정복되었지만 [[바스크]]족은 끝까지 독립을 유지했다. [[동로마 제국]]과는 초기에는 소 닭 보듯 하는 관계였으나 [[유스티니아누스 대제]] 시기 고토 수복 전쟁의 일환으로 서고트 왕국의 내전에 개입해 핍박받던 정통 기독교인의 지지에 힘입어 이베리아 반도 남부 일대를 점령하고 히스파니아 속주를 설치하면서 서로 전쟁을 치루게 된다. 동로마-페르시아 전쟁이 한창이던 624년에는 마침내 카르타고 노바(현 [[카르타헤나(스페인)|카르타헤나]])에서 [[이베리아 반도]] 본토[* [[발레아레스 제도]] 및 지브롤터 건너의 [[세우타]], [[탕헤르]] 등 지역은 반독립상태였지만 어쨌든 우마이야 제국이 698년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나서 더욱 서진한 8세기 극초반까지는 동로마령이었다.]의 동로마 세력을 완전히 쫓아내 버려, 마침내 [[칸타브리아]]를 정복한 [[아우구스투스]] 초기 기원전 1세기 말부터 5세기 초까지의 [[고대 로마]] 다음으로 이베리아 반도 통일을 이루었다. 하지만 동로마가 7세기 내내 페르시아-이슬람 제국이라는 동방의 강적과의 사투에 전념해 있을 때 예전 [[반달 왕국]]처럼 이베리아 반도를 넘어, 방어가 매우 취약했던[* 당시 동로마는 서방 영토의 군부대까지 상당히 차출해서 동부전선의 전쟁을 치렀다.]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의 후방 지역을 치지는 않았고 딱 이베리아 반도에만 만족했다. 북아프리카나 이탈리아를 침공하려면 해군이 필수였는데, 귀족들 간의 내부 분쟁이 치열했기 때문에 해군까지 동원한 대외원정을 도모하기에는 무리였다고 볼 수도 있으며, 오히려 이슬람이 북아프리카에까지 출몰해 오는 7세기 중후반에는 [[순망치한]]의 원리로 동로마의 아프리카군에 서고트가 군대를 파견해서 동맹해서 함께 싸우기도 했다. 프랑크 왕국의 경우 지리적인 이유로 딱히 외교관계가 없었지만 갈리아를 평정하고 다양한 분파로 나뉘어진 프랑크족을 통합한 [[클로비스 1세]]에게 부예 전투에서 알라리크 2세가 전사하는 수모까지 겪으며 국토의 절반인 아키텐, 셉티마니아 해안가 이외 갈리아 영역을 잃으면서 수세에 몰리게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